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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O O K/Book Review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by Daisy Lee 2021. 9. 9.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심시선이라는 할머니가 예술가로써 살아간 이야기와

그녀로부터 비롯된 가족들의 삶과 그들이 추억하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많은 인물이 나와서 암기력 안좋은 나는

읽을 때마다 맨 앞장의 인물관계도를 다시 펴봤었다.

관계들이 머리 속에 입력되고 최애캐가 생겨날 때쯤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아쉽기도 했던 책이었다.

20세기를 살아낸 시선 할머니가 멋있으면서도, 안쓰러웠다. 이전 세대보다 가장 여성으로서 평등하다고 여겨지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불평등과 마주하는 여성들이 묘사된 점도 좋았다. 뉴스와 일상을 마주하며 불편함과 분노를 느꼈던 부분을 이야기 속에 담아주셨다. 매일 마주하지만 외면하는 슬프고 화나는 이야기들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후대에는 모두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하며, 꿈을 꾸고 이루며 살기를 바라고 싶다.

소설 속 나의 최애캐는 우윤이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아주 약하고 홀로 유학생활을 하는 우윤은 운동신경이 없지만, 시선 할머니의 제사를 위해서 모인 하와이에서 서핑 강습을 받는다. 계속되는 실패에도 끈질기게 서핑을 연습하며 마지막 딱 한번 서핑보드 위에 올라탄다. 완벽하게 파도를 탄 후, 그 파도의 거품을 시선 할머니의 제사에 가져간 우윤을 보며 그녀의 마음 속에 늘 아픈 아이가 자유로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P13

이렇게 대단한 걸 그려도 그보다 중요한 정보는 남성 화가의 배우자란 점인지,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P15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P21

창작의 욕구와 자기 파괴의 욕구가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라는 것이 언제나 나를 슬프기 했습니다.

P29

부당한 도시에서 오로지 서로만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었기에, 사람을 꺾는 모멸감 속에서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P122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P125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P141

원래 모든 운동은 계단식으로 느는거야.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포기하면 안 돼.

자신의 계단만 유난히 폭이 넓고 험난한 형태인지, 우윤은 투덜거렸다.

P153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P201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P229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

P231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 돌아와.

P237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나.

P248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P256

리더십이라는 것은 지금껏 별로 사용해보지 않는 도구였다. 그게 자신 안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P262

업계의 대충 희망이 되고 싶었다. 진짜 희망이 나타나기 전의 대타 같은 희망 말이다. 레드오션 업계에서 무난한 자질을 가지고도 오래 견디는 여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힘을 얻겠지 싶어서.

P264

내가 나 자신을 작은 틀에 가두고 있지는 않나?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나들한테 맡겨버려요.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P269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P288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

“큰 파도 체질니네. 그런 사람들이 있지.”

P291

한번에 대단한 시야를 얻을 수 없어. 어두운 곳에서 짚어가며 넘어져가며 탐색할 수밖에 없다는 걸.

P304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P304

그 시대 여자들은 다른 여자가 귀엽다 싶으면 김치를 보냈다고.

P319

어느 대륙 어느 문화권에서건 투척자는 99퍼센트 남자였다.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뉴스는 화수에게 와 독하게 고이곤 했다. 일곱살 짜리가 공원 화장실에서 강간당하고, 스물한살짜리가 그저 이별을 원했단 이유로 목이 졸렸다. 앞으로도 통과시킬 수 없을 거란 걸 알았다.

P322-323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냈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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