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권을 다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종이 활자를 읽는 것이 집중이 안된단 이유로 지난 2년동안 책을 좀 멀리했었다. 매해 결심해보지만 정말 올해부터는 꼭 한달에 책 2권씩은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에 책발전소에서 앞부분만 살짝 보고 읽지 않은 이 책에는 내가 완전 사랑하는 곽명주 일러스트 작가의 그림이 들어가있다. 책 커버 뿐만 아니라 단편소설 중간중간 마다 그림이 삽입되있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로 엮어진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춤을 추며 말 없이>이다.
강원도에서 할아버지와 살던 어린 소년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며 할아버지가 혼자 살게 되자, 인공지능 로봇 말로를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준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조차 무덤덤 하던 화자는 인공지능 로봇 말로를 자취방으로 가져왔고, 할아버지의 언어를 배운 로봇 ‘소년’과 대화하며 일상을 보낸다. 할아버지처럼 말하는 ‘소년’이 녹슬어 더 이상 대화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버려지게 되자 떠난 이와의 이별을 슬퍼한다.
책 한권을 다 읽은 것도 오랜만 인데 울면서 읽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항상 옆에 있어 당연한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지 돌아보았다. 얼마 전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서 본 인터뷰가 생각이 났다. 강화도 휴전선 앞에서 100세의 양아버지와 함께 장사 하시는 어머님이었다. “나는 매일 이별 연습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잘 이별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이별하고 싶어요.” 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작가는 인상 깊은 단어나 문장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그 문장과 단어 하나로 하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각 이야기 별로 묵직한 한 단어, 묵직한 한 문장들이 쎄게 와닿았다.
아일리쉬 고양이라는 이야기에서 영국을 떠나는 룸메이트에게 “나빠지지 않겠다고 해, 어디서든 그러자고.” 라고 말한다. 상상조차 어렵도록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힘내라고 제발 살아달라고 말하기조차 미안했었다. 그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제발 여기서 더 나빠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제발 숨을 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면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기보다 마치 밭에서 무 같은 것을 뽑아올리듯 자신을 이불 속에서 끄집어낸다는 느낌이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정류장까지 왔고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컨디션이 얼마나 좋든, 정신을 얼마나 차렸든, 출근 준비가 얼마나 되었든 그렇게 일단 버스에 타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든 시작되는 것이었다.
P40
남자는 주인이 없던 포장마차에서와는 다르게 무표정했고 맛이 없는지 에그 머핀을 반 정도 먹다가 내려놓았다. 어떤 날에는 반만 그렇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P51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경겨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P77-78
말을 수면 위의 파문처럼 마음을 울려 받아들이던 사람.
P91
그 전까지는 전화는 했어도 문자메시지는 남기지 않았는데 왜냐면 자기가 쓴 어떤 말이 그 창에 덩그러니 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P98-99
주용은 어쩌면 아주 어려서부터 영란의 마음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히려 듣는 이의 관성화된 귀와 마음이 아닐까.
P112
뭔가를 부러뜨리거나 충격을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워낼 수 없는 그 사랑의 고약한 성질에 대해 생각했다.
P126
하지만 그렇게 휘갈기듯 쓴 문장 없이는 도로 하나 건너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는 떠나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P133
커넥티드 북스토어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엘피를 들으며...
“넌 이제 한국 가면 뭘 하려고?” Y가 물었고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나빠지지는 않으려고.”
그래, 나빠지면 안되지. 그거면 되지.”
P134
“나빠지지 않겠다고 해. 어디서든 그러자고.”
P136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으며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단 한번도 울지 않은 사람이라서 애석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내면이라는 것에 대해 잊어버리곤 했다. 타인의 내면이란 그것이 흔들리고 더러는 깨어질 때, 그러니까 마치 재즈처럼 마음이 평상의 리듬을 벗어나 예상치 못하게 변주될 때 만져지는데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플랫’한 모습이었다.
P139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P146
삼촌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순간조차 블루지한 템포에 영혼을 맡긴 채 불행에 대한 체념도 외면도 아닌, 비비 킹의 대표곡처럼 인생의 ‘스릴’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통과할 줄 알았던 소년이었다고.
P146
프리랜서라는 것이 자기가 자기 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한다는 것이지 아무나 함부로 그 ‘프리함’을 아용하는 개 아니라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모르는 척 하고 싶거나.
P148
그것이 이것보다 어려운가, 이것은 그것보다 쉬운가 하는 삶의 온도차를 재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P153
“나는 하나도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자신있게 늙고 있어.”
P165
나무는 꼭 그렇지 않아? 이렇게 겨울을 견디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의 경계에 놓인 것 같아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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